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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상묵스님 “2천여 그림 불탄 뒤 욕심을 내려놨죠”
풍월산객
2011. 11. 8. 07:57
- [이 사람]상묵스님 “2천여 그림 불탄 뒤 욕심을 내려놨죠”
- 하동=강석봉 기자 ksb@kyunghyang.com
가을 산사의 풍광이 고즈넉하다. 불과 몇년 전만해도 화재로 모든 것이 소실된 이 곳에 ‘산중미술관’이 터를 잡았다. 당시만해도 절 꼴이 말이 아니었다. 변변한 건물없이 콘테이너 박스에 움막이 전부였으니…. 화개장터 인근의 산속 깊은 곳에 터를 잡은 지리산 지통사는 그렇게 ‘무’(無)에서 ‘유’(有)로, 또 다시 ‘유’에서 ‘무’로 윤회를 거듭했다. 타고 없어진 터에서불심과 그림의 열정을 다시 불살라, 지난달 22일 미술관을 개관하며 ‘꿈꾸는 미술전’을 열고 있는 ‘노사나 상묵’ 스님에게서 번뇌와 희망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화재로 2000여 점이 소실된 그 터에 산중미술관의 낸 상묵 스님의 감회는 남다르다. 화재 후 움막에서 행자도 없이 하루 한끼로 시름을 달래던 스님이, 쉽지 않은 여정 끝에 개관한 산중미술관 앞에서 ‘보무도 당당히’ 포즈를 취하고 있다.
# 화마를 딛고 서다
“수년간 그린 그림이 화재로 불탔지만 아쉽기보다 배운 게 많았어. 그리고 이렇게 미술관을 다시 열었으니, 번뇌가 희망을 가능케 한게지.”
은둔을 통해 불심을 깨치고, 그림을 통해 불심을 키우는 지통사의 상묵 스님(60)의 얼굴에 화색이 만면하다. 스님은 “1997년 5월 첫 개인전을 연 이후 지금까지 15회의 개인전을 여는 동안 이번 전시회가 가장 어려웠어”라고 운을 떼며, “자연과 차(茶), 그림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는 기회가 될거야”고 말했다. 하지만 이내 얼굴을 붉히며, “손 짧은 그림을 선보이게 되는 것은 아닌지…”라며 몸을 한껏 낮췄다.
그도 그럴 것이 스님에게는 잊지 못할 한 사건이 기억 저편에 여전히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2001년 겨울, 화재로 30년 가까이 수행하며 그려온 그림 2000여 점이 모두 불탔다. 난망하기 이를 데 없었을 당시를 떠올리며 스님은 “끼니를 때울 먹을거리도 풍족치 않았으니 화구를 살 돈이야 엄두도 못 낼 일이었어”라고 고백했다. 이어 “캔버스는 없고, 그림은 그려야 겠고 해서, 널빤지를 모아 황톳물을 먹인 다음 거기에 그림을 그렸어!”라며 화재 이후 어려운 상황을 파노라마로 펼쳐보였다.
돌이켜보면 지통사가 겪은 어려움은 자리를 틀고 앉은 그 동네와 닮아 있었다. 근대사의 질곡을 대하드라마로 펼쳐 보인 소설 ‘토지’의 평사리가 호위하고, 민초의 삶을 어루만지며 억척스럽게도 역사를 걸어온 짚신의 고장 신기마을이 떠받치는 곳에 절간이 자리했다. 행정구역으로 따지면 지통사는 경남 하동군 화개면 탑리의 지리산 형제봉 중턱으로 백운산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작은 암자다. 쌍계사의 말사인 그 절에서 상묵 스님이 세상을 그리고 있었던 것.

기와에 그린 부처그림.
# ‘유’에서 ‘무’, 또다시 윤회
스님은 꽤나 이름이 알려진 화가다. 미술을 공부하던 스님은 1972년,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기 위해 지리산 쌍계사에서 출가한 후 해인사와 통도사, 범어사, 대흥사, 실상사 등을 다니며 불심에 빠져들었다. 지리산 깊은 곳의 고즈넉한 산사와 외로이 그림을 그리는 스님이라 로맨틱한 에피소드가 똬리를 틀고 있을 줄 알았지만, 스님도 사람이라 인생사 질곡이 세속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 정점에 지통사 화재 사건이 있었던 것.
수년간 그려온 작품으로 프랑스에서 전시회를 열기 며칠 전, 우연치 않은 화재로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갔단다. 스님 옷가지마저 활활 태우고 그저 온전히 스님 몸 하나만 남겨놓았다는 말에 가슴 한켠이 아려온다. 스님의 말대로라면, 이 곳엔 몇년 전까지만 해도 절터는 있되 불사는 없었다. 지나는 사람이 스치듯 보면 스님이 있음인지 농군이 있음인지, 법의 입은 촌로가 작은 소채밭을 분주히 오가는 모습을 봤을 게 분명하다.
어찌보면 화재 뒤 지통사는 스님이 바랑 하나 짊어지고 처음 찾았던 지통사를 빼닮았다. 절터만 있던 곳에 스님은 토굴을 마련하고 철저하게 수도승의 삶을 살았다. 쌀과 소금만을 사오고 스스로 농사를 지어 끼니를 해결했다. 산을 내려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봄철에 내려가면 마을의 농부들이 모자리를 내고 있었고, 다음에 내려가면 논에 벼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또다시 산사를 내려갈 즈음이면 들판에 추수가 한창이었다. 그렇게 자연 속에서 그 일부가 되어 생활했다.
‘유’를 ‘무’로 돌린 부처님의 뜻에 스님은 번뇌에 빠져들었다. 스님 눈엔, 불심인지 선심인지 당신의 손을 통해 환생했다 사라진 그림들이 신기루처럼 아련했지만, 지통사 앞 뜰의 무심한 꽃들은 언제나처럼 피고졌다. 그 모습이 스님을 깨웠다. 속세를 잊고 살아가다 처음 붓을 든 순간이 떠올랐던 것이다.
“출가한 후 한동안 그림을 잊고 지냈지. 그런데 숙소로 돌아오다가 비가 갠 후 법당 지붕 기와 위에 덮여 있는 푸른 이끼를 보면서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어. 그래서 다시 붓을 잡은거야. 그 때 그 마음으로 화재 후 다시 붓을 들게 됐지.”

# 크게 잃어야 크게 얻는다
스님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돈도 없었거니와 자연을 닮은 그만의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손으로 두드려 만든 화판에 황토를 덧씌워 황토 캔버스를 만들었다. 그리고 캔버스는 버려진 술병이며, 수명 다한 기왓장으로 옮겨졌다. 사람들이 생명 다해 버린 것을 주워와 생명을 심고 있다. 유화와 수채화 작품도 즐비하다.
스님들이 하안거·동안거에 들어가면, 스님 역시 화방으로 숨어들어 그림으로 수행을 시작한다. 그렇게 또다시 채워진 그림은 스님의 마음 속에 불심을 채우듯, 화방에 켜켜이 쌓여갔다.
세상과 철저히 격리된 대자연 속에서 수도생활을 하면서 그려낸 스님의 그림은 독창적이다. 초기의 극사실적인 표현 기법은 혼자 수도 생활을 하면서 불교적인 색채가 물씬 풍기는 절제되고 힘찬 선으로, 그리고 단순화된 풍경으로 변화되다가 다시 수도승의 구도 생활을 그리는 동양적인 부드러움으로 나타난다. 그러다 보니 스님의 그림은 유화로, 혹은 동양화로, 혹은 묵화로 표현된다. 때로는 섬진강의 모래와 자갈을 그대로 사용해 캔버스에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스님은 그림의 소재를 따로 찾지 않는다고 한다. 자신의 일상생활이 소재가 된다.

“어린 적 여름이면 동네 방죽에서 물놀이를 했고, 겨울이면 대나무를 다듬어 썰매를 만들었어. 그 때를 떠올리며 이번 전시회의 이름을 ‘꿈꾸는 동심’이라고 붙였지. 인적 드문 산중에서 전시회를 하니까 관람객이 일마나 찾겠어. 많고 적음은 상관없어. 그저 마음과 마음이 와 닿는 분과 차를 마시며 그림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
옛 큰스님 말씀 중 ‘큰 것을 잃어야 큰 것을 얻는다’는 말이 있다. 상묵 스님이 잃은 것은 욕심이요, 얻은 것은 불자로 불심이고 화가로 동심이다. 각박한 세상 살이에 지친 사람이라면, 스님께 마음 한 냥 적선을 부탁해도 나쁘지 않을 듯 싶다.

60여평의 전시관, 연중무휴로 운영
지통사 입구에 서면 요새를 방불케하는 돌 축대가 인상적이다. 상묵 스님이 일일이 쌓았다는 그 터에 산중미술관이 자리를 잡았다. 돌 축대를 쌓듯 산사의 순수 그림들이 60여 평의 전시 공간을 채워갈 예정이다. 이 곳에는 4호에서 500호까지 90여 점의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대문없는 산사인만큼 연중 무휴다. 관람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한달에 한번씩 그림을 바꿔 전시할 예정이다. 055-883-3751.
지통사 입구에 서면 요새를 방불케하는 돌 축대가 인상적이다. 상묵 스님이 일일이 쌓았다는 그 터에 산중미술관이 자리를 잡았다. 돌 축대를 쌓듯 산사의 순수 그림들이 60여 평의 전시 공간을 채워갈 예정이다. 이 곳에는 4호에서 500호까지 90여 점의 작품들이 상설 전시되고 있다. 대문없는 산사인만큼 연중 무휴다. 관람은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로 한달에 한번씩 그림을 바꿔 전시할 예정이다. 055-883-3751.